第十一回
劉皇叔北海救孔融 呂溫侯濮陽破曹操
유황숙 북해구공융 여온후 복양파조조
유황숙이 북해에서 공융을 구하고, 여포(吕温侯)가 복양에서 조조를 격파하다)
북구복파(北救濮破) 북해를 구하고, 복양에서 격파하다
미자 중(糜竺)의 기이한 만남
먼저, 계책(獻計)을 올린 이는 동해군(東海) 구현(朐縣) 출신으로, 성은 미(糜), 이름은 축(竺), 자(字)는 **자중(子仲)**이었다.
집안 대대로 부유하여, 한 번은 낙양(洛陽)에 가서 장사를 마치고 수레를 타고 돌아오던 중 우연히 한 절세의 미인(美婦人)을 만나게 된다.
그 여인은 함께 수레를 타고 가길 청하였고, 미축은 곧장 수레에서 내려걸으면서 자리를 양보했다.
여인이 도리어 미축에게 같이 타자 청하자, 그는 바른 자세로 올라앉아 눈길조차 함부로 주지 않았다.
그렇게 몇 리쯤 달리다 보니, 여인이 작별을 고하며 말하기를,
“나는 남방(南方)의 **화덕성군(火德星君)**으로서, 하늘의 명(上帝敕)을 받아 바로 그대 집을 태우러 가던 참이오.
그런데 그대가 나를 극진히 모셔 주었으니, 예를 갖춘 보답으로 미리 알려 주겠소.
그대는 지금 곧 집에 달려가 재물을 옮기시오.
오늘밤 내가 반드시 갈 것이오.”
이 말을 남기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미축은 크게 놀라, 집으로 뛰어 돌아가 있는 재산을 모조리 옮겨 냈다.
미축(糜竺)의 불길한 예고, 그리고 북해로의 출진
그날 밤 과연 부엌에서 불이 일어나 온 집을 모조리 태우고 말았다.
미축(糜竺)은 이 일을 계기로 더욱 재산을 베풀어 가난한 이를 돕고, 고통을 구제하였다.
이후 도겸(陶謙)이 그를 별가종사(別駕從事)로 초빙하였다.
그날 미축이 계책을 아뢰어 말하기를,
“제가 직접 북해군(北海郡)에 가서 공융(孔融)께 군대를 일으켜 구원해 달라 청하겠습니다.
또 한 사람을 청주(靑州)의 전해(田楷)께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면 어떻겠습니까?
두 곳에서 병력이 함께 온다면, (조조) 그 자가 틀림없이 물러날 것입니다.”
도겸이 이를 받아들여 편지를 두 통 썼다.
그리고 휘하에 묻기를,
“누가 감히 청주로 가서 구해 달라 청하겠는가?”
그러자 한 사람이 선뜻 나서겠노라 응답했다.
사람들이 보니 그는 광릉(廣陵) 출신으로 성은 진(陳), 이름은 등(登), 자(字)는 원룡(元龍)이었다.
도겸은 먼저 진원룡을 청주로 보낸 뒤, 미축에게도 서찰을 주어 북해로 가게 하였다.
그는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며 공격을 대비하였다.
공융(孔融): 공자의 20 세손이자 북해의 명군(名郡)
북해태수 공융(孔融)은 자(字)가 문 거(文舉)이며, 노국(魯國) 곡부(曲阜) 출신이다.
그는 공자(孔子)의 20 세손이며, 태산 도우미 공주(孔宙)의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재능을 보였으며, 10세에 하남윤 이응(李膺)을 찾아가 뵙고자 하였다.
그러나 문지기가 가로막자 공융이 당당히 말하기를,
"나는 이가(李家)와 오래된 인연이 있는 집안의 후손입니다."
이응을 만나게 되자 이응이 묻기를,
“너의 조상과 나의 조상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공융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공자께서 노자(老子)께 예를 물으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와 공께서는 대대로 이어진 교류가 있는 집안이지요.”
이응이 크게 놀라며 감탄했다. 잠시 후, 태중대부 진위(陳煒)가 찾아오니, 이응이 공융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정말 기이한 아이다.”
그러자 진위가 말하기를,
“어려서 총명하다고 해서, 커서도 반드시 총명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를 듣자마자 공융이 곧바로 응답하기를,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어릴 적에는 틀림없이 총명하셨겠군요!”
이 말에 모두 크게 웃으며 진위가 말하기를,
“이 아이가 장성하면 반드시 당대의 큰 인물이 될 것이다.”
이 일로 공융은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후에 중랑장(中郎將)이 되었고, 여러 번 승진하여 북해태수에 올랐다.
공융은 손님 접대를 극도로 좋아하며 늘 말하곤 했다.
“자리에 손님이 항상 가득하고, 술잔에 술이 비지 않는 것이 내 바람이다!”
그는 북해태수로 6년간 재직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공융과 미축의 만남, 그리고 황건적 관해의 등장
그날 공융(孔融)이 손님들과 대화하고 있는데, 누군가 와서 알리기를,
“서주의 미축(糜竺)이 찾아왔습니다.”
공융이 그를 안으로 들여 만나보고 온 이유를 물으니, 미축이 도겸(陶謙)의 서찰을 꺼내며 말하기를,
“조조(曹操)가 맹렬히 서주를 포위 공격하고 있으니, 명공(明公)께서 자비를 베풀어 구원해 주십시오.”
공융이 말하기를,
“나와 도겸은 교분이 두텁고, 자중(미축)이 몸소 여기까지 왔으니 어찌 가지 않겠는가?
그러나 조맹덕(조조)과 나는 원한이 없으니, 먼저 화해 편지를 보내보고, 만약 그가 따르지 않으면 그때 군사를 일으키겠다.”
미축이 대답하기를,
“조조는 병력의 위세를 믿고 절대 화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공융은 한편으로 병력을 점검하고, 한편으로 사람을 보내 화해 편지를 보냈다.
바로 그때 급보가 날아들기를,
“황건적의 잔당인 관해(管亥)가 무리 수만 명을 이끌고 몰려옵니다!”
공융, 관해의 협박에 맞서다
황건적 관해(管亥)가 북해를 위협하자, 공융(孔融)은 크게 놀라 황급히 본부 병력을 소집해 성 밖으로 나가 적과 맞섰다.
관해가 말을 타고 나와 협박하듯 외쳤다.
“내가 알기로 북해에 곡식이 풍부하다 하니, 1만 석만 빌려주면 군사를 물리겠다.
그렇지 않으면 성을 부수고 늙은이와 아이도 남기지 않겠다!”
공융은 이를 듣고 크게 꾸짖었다.
“나는 대한(大漢)의 신하로서, 한나라의 땅을 지키고 있다.
어찌 양식을 도적에게 주겠는가!”
이에 관해가 격노하며 말을 채찍질해 달리고 칼을 휘둘러 공융을 겨냥했다.
공융의 장수 종보(宗寶)가 창을 들고 나섰지만, 관해와 몇 합 싸우지도 못하고 그만 그의 칼에 맞아 말 아래로 쓰러지고 말았다.
공융의 군대는 크게 어지러워졌고, 결국 성 안으로 물러나 숨었다.
관해는 병력을 나누어 성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공융은 가슴이 답답해 숨을 쉴 수 없었고, 미축(糜竺)도 깊은 근심에 빠져 말을 잇지 못했다.
태사자(太史慈), 기적처럼 나타나다
다음날, 공융(孔融)이 성 위에 올라 바라보니 적의 세력이 매우 커서 그의 걱정은 배가 되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성 밖에서 한 사람이 창을 들고 말을 몰아 적진으로 뛰어들더니 좌충우돌하며 적을 쓸어버렸다.
그의 모습은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온 듯 용맹했고, 그는 성 아래까지 다다르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문을 열어라!”
공융은 그가 누구인지 몰라 감히 문을 열지 못했다.
그때 적 무리가 해자 근처까지 몰려오자, 그 사람은 다시 몸을 돌려 창을 휘둘러 적군 열댓 명을 말에서 떨어뜨렸다.
적군은 두려워 물러났고, 공융은 급히 명하여 문을 열어 그를 성 안으로 들였다.
그 사람이 말에서 내려 창을 버리고 성 위로 올라가 공융에게 절을 올렸다.
공융이 그의 이름을 묻자, 그가 대답했다.
“저는 동래군(東萊郡) 황현(黃縣) 출신으로, 복성(復姓)은 태사(太史), 이름은 자(慈), 자는 자의(子義)입니다.
노모께서 공융님께 크게 은혜를 입으셨습니다.
제가 어제 요동(遼東)에서 집으로 돌아와 노모를 뵙고 적이 성을 포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모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사또의 은덕을 여러 차례 받았으니 마땅히 가서 도와라.’ 하셨기에 제가 단기필마로 달려온 것입니다.”
공융은 크게 기뻐했다.
사실 공융과 태사자는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공융은 이미 태사자가 영웅임을 알고 있었다.
태사자가 멀리 나가 있는 동안 그의 노모는 성 밖 20리 밖에 살고 있었는데, 공융은 늘 사람을 시켜 곡식과 비단을 보내어 그들을 도왔다.
노모가 공융의 은혜에 감동하여 태사자를 보낸 것이다
태사자(太史慈), 목숨을 건 탈출
공융(孔融)은 태사자(太史慈)를 극진히 대접하며 갑옷과 안장, 말을 선물했다.
태사자가 말하기를,
“정예병 1천 명을 빌려 주시면 성을 나가 적을 치겠습니다.”
공융이 대답하기를,
“그대가 비록 용맹하나 적의 세력이 너무 강하니 가볍게 나가선 안 됩니다.”
그러자 태사자가 결연히 말하기를,
“저의 노모께서 공께서 베푸신 두터운 은혜에 감격하여 저를 보냈습니다.
만약 포위를 풀지 못한다면, 저 또한 노모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습니다!”
공융이 잠시 생각한 뒤 말하기를,
“내가 듣자니 유현덕(劉玄德)이 당대의 영웅이라는데, 그를 불러오면 이 포위가 저절로 풀릴 것이다.
다만, 그를 부르러 갈 사람이 없다.”
태사자가 즉시 나서며,
“공께서 서찰만 써 주신다면 제가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공융이 기뻐하며 서찰을 태사자에게 주었다.
태사자는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타 허리에 활과 화살을 차고 손에 철창을 들었다.
배불리 식사를 마친 후 단단히 준비를 갖추고 성문이 열리자 단기필마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가 해자 근처에 이르자 적장이 병력을 이끌고 와서 맞섰다.
태사자는 적 몇 명을 창으로 찔러 죽이며 포위를 뚫고 나갔다.
관해(管亥)가 누군가 성을 나간 것을 보고 구원병을 요청하러 간 것이라 짐작하고, 수백 기병을 이끌고 뒤쫓으며 여덟 방향에서 포위했다.
태사자는 창을 세워 의지한 채 활과 화살을 들어 여덟 방향으로 쏘았다.
그의 화살은 단 한 번도 빗나가지 않고 적을 말에서 떨어뜨렸고, 적군은 두려워 감히 더 이상 추격하지 못했다.
태사자와 유비의 만남, 북해를 구할 구원군 결성
태사자(太史慈)는 적진을 뚫고 무사히 탈출하여 별빛 가득한 밤을 달려 평원으로 가 유현덕(劉玄德)을 만났다.
그는 공손히 인사를 드린 후 공융(孔融)이 포위당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서신을 건넸다.
유비가 서신을 읽은 후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태사자가 대답했다.
“저는 태사자라 하며, 동해의 촌사람입니다.
공융과는 혈육도 아니고 같은 고향 사람도 아니지만, 의로움으로 서로 뜻이 맞아 우환을 함께 나누기로 했습니다.
지금 관해(管亥)가 난폭하게 북해를 포위하여 공융은 외롭고 도움받을 곳 없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제가 듣기로 유공(유비)께서는 인자하고 정의로운 분으로, 어려운 사람을 구하는 데 앞장선다 하여 목숨을 걸고 포위를 뚫고 와서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유비가 진중한 표정으로 답했다.
“공융이 천하에 유비가 있다는 것을 아는가?”
그는 즉시 운장(關羽)과 익덕(張飛)과 함께 정예병 3천을 징집해 북해를 향해 출발했다.
관우의 청룡언월도, 관해를 베다
관해(管亥)는 구원군이 오는 것을 보고 직접 병력을 이끌고 맞섰다.
유비(玄德)의 군대가 적은 것을 보고 가볍게 여겼다.
유비는 관우(關羽), 장비(張飛), 태사자(太史慈)와 함께 말을 타고 전열에 섰다.
관해가 분노하며 곧바로 돌진하자 태사자가 나서려 했으나, 관우가 먼저 나서며 관해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 말이 맞붙자 군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관해가 관우를 어떻게 대적할 수 있겠는가?
수십 합 만에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번뜩이며 관해를 베어 말 아래로 쓰러뜨렸다.
이때 태사자와 장비도 말을 몰아 적진으로 돌진하며 쌍창을 들고 휘몰아쳤다.
유비도 병력을 이끌고 총공격을 가했다.
성 위에서 공융(孔融)이 이 광경을 내려다보니, 태사자와 관우, 장비가 적들을 쫓으며 마치 호랑이가 양 떼 속에 뛰어든 것처럼 적진을 휘젓는 모습이었다.
공융도 병력을 몰고 성문을 열어 나왔다.
안팎으로 적을 협공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항복한 자가 무수히 많았으며, 나머지 적들은 완전히 흩어져 달아났다.
공융과 유비, 서주의 위기를 논하다
공융(孔融)이 유비(玄德)를 성 안으로 맞아들여 예를 갖춰 인사를 나눈 뒤, 큰 잔치를 베풀어 축하했다.
공융은 미축(糜竺)을 불러 유비에게 소개하며 말했다.
“장개(張闓)가 조조(曹操)의 아버지 조숭(曹嵩)을 죽인 사건으로 인해 조조가 군사를 풀어 서주를 포위하고 약탈하고 있습니다.
서주가 위급하니 도와주십시오.”
유비는 이를 듣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도겸(陶恭祖)은 어진 군자인데,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다니 뜻밖입니다.”
공융이 덧붙였다.
“공(유비)은 한실(漢室)의 종친이십니다.
이제 조조가 백성을 괴롭히고 강한 자로 약한 자를 업신여기는 이때, 어찌 저와 함께 서주를 구하지 않으십니까?”
유비는 잠시 망설이며 답했다.
“제가 감히 이를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병력이 적고 장수도 부족하여 가볍게 나서기 어렵습니다.”
공융이 다시 말했다.
“제가 도겸을 돕고자 하는 것은 단지 오래된 우정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대의를 위한 일입니다.
공께서도 의로움을 저버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유비는 이 말을 듣고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문거(공융)께서 먼저 출발하십시오.
저는 공손찬(公孫瓚)에게 가서 병력 3~5천 명을 빌린 뒤 바로 뒤따르겠습니다.”
공융은 유비를 믿으며 말했다.
“공께서 약속을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