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와 의리, 그리고 새로운 여정
유비(玄德)가 말했다.
“공께서는 저 유비를 어떤 사람으로 보십니까?
성인께서 이르시길, ‘예로부터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으나, 신의 없이는 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군대를 빌리든 못 빌리든 반드시 직접 도우러 갈 것입니다.”
공융(孔融)은 이 말을 듣고 유비를 신뢰하며, 미축(糜竺)에게 먼저 서주(徐州)로 돌아가 상황을 알리라 명하고 자신도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한편, 태사자(太史慈)는 공융에게 절하며 말했다.
“저는 모친의 명을 받들어 도움을 드리러 왔는데, 이제 무사히 일이 마무리되어 다행입니다.
하지만 양주(揚州)의 자사(刺史) 유요(劉繇)가 저와 같은 고향 사람으로 서신을 보내어 부르니, 감히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훗날 다시 뵙겠습니다.”
공융은 금과 비단으로 보답하려 했으나 태사자는 이를 받지 않고 떠났다.
태사자의 모친은 아들이 돌아오자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네가 북해의 은혜를 갚는 모습을 보니 정말 기쁘구나!”
곧 태사자는 양주로 떠나갔다.
유비, 공손찬의 군사와 조자룡을 빌리다
한편, 유비(玄德)가 북해를 떠나 공손찬(公孫瓚)을 만나 서주를 구하려는 뜻을 전했다.
공손찬이 물었다.
“조조(曹操)와 그대는 원한이 없는데, 어찌 남을 위해 힘을 쓰려하시오?”
유비가 단호히 대답했다.
“제가 이미 약속을 했으니, 신의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공손찬은 유비의 결의를 보고 말했다.
“내가 기병과 보병 2천을 빌려주겠소.”
유비가 덧붙였다.
“조자룡(趙子龍)도 함께 보내주십시오.”
공손찬이 이를 허락했다.
이에 유비는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와 함께 봉군 3천을 이끌고 선봉에 섰고, 조자룡이 2천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 서주로 향했다.
한편, 미축(糜竺)이 도겸(陶謙)에게 돌아가 보고하기를,
“북해에서 유현덕(유비)을 요청해 도움을 받았습니다.”
또한 진등(陳登)은 청주의 전해(田楷)가 기꺼이 병력을 이끌고 구원하겠다고 보고했다.
도겸은 이를 듣고 안심했다.
그러나 공융(孔融)과 전해의 두 길의 군대는 조조의 군세가 워낙 강력한 것을 두려워해, 멀리 산 아래 진영을 꾸리고 쉽게 진격하지 못했다.
조조 또한 두 길의 군대가 도착한 것을 보고 병력을 나누어야 했기에, 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멈췄다.
유비와 장비, 조조 진영을 돌파하다
유비(玄德)의 군대가 도착해 공융(孔融)을 만났다.
공융이 말했다.
“조조(曹操)의 군세가 강대하고 그가 용병에 능하니 가볍게 싸워서는 안 됩니다.
우선 그 동태를 살핀 뒤에 진격합시다.”
유비가 답했다.
“하지만 성안에 양식이 부족해 오래 버티기 어려울까 염려됩니다.
제가 관우(雲長)와 조자룡(子龍)에게 4천 명을 맡겨 공의 휘하를 돕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장비(張飛)와 함께 조조의 진영을 뚫고 서주로 가서 도겸(陶謙) 사또와 상의하겠습니다.”
공융은 크게 기뻐하며 전해(田楷)와 함께 군대를 회합하여 협공의 태세를 이루었다.
관우와 조자룡은 병력을 이끌고 양쪽에서 접응하였다.
그날, 유비와 장비는 1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조의 진영 옆으로 돌격했다.
가는 도중, 조조 진영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기병과 보병이 물결처럼 몰려나왔다.
선두에는 대장 우금(於禁)이 말을 멈추고 크게 외쳤다.
“어디서 온 미치광이들이냐! 어디로 가는 것이냐!”
장비는 이를 보고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곧바로 우금을 향해 돌진했다.
두 마리 말이 맞붙어 몇 합을 싸우는 동안, 유비가 쌍고검을 뽑아 군사를 지휘하며 공격을 강화하자, 우금은 패주 하였다.
장비는 선두에서 적을 추격하며 서주성 아래까지 몰아쳤다.
서주를 지키는 대의
성 위에서 붉은 깃발에 흰 글자로 쓰인 “평원 유현덕(平原 劉玄德)”을 본 도겸(陶謙)은 급히 성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유비(玄德)가 성에 들어가자 도겸이 나와 맞이하고 함께 관청으로 향했다.
예를 마친 후, 도겸은 연회를 베풀어 유비를 환대하고 한편으로 군사들을 위로했다.
도겸은 유비의 준수한 외모와 달변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미축(糜竺)이여, 서주의 관인(官印)을 가져오라. 내가 이곳을 유비에게 양도하겠다.”
유비는 깜짝 놀라 물었다.
“공께서는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도겸이 대답했다.
“지금 천하는 어지럽고 조정의 기강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공은 한실(漢室)의 종친으로 마땅히 사직(社稷)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나는 이미 늙고 무능하니 서주를 공에게 양도하고 싶습니다.
사양하지 마십시오.
내가 직접 표문(表文)을 써서 조정에 상주하겠습니다.”
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번 절하며 말했다.
“제가 비록 한실의 후예라 하나, 덕이 얕고 능력이 부족하여 평원상(平原相)도 제 직분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운 형편입니다.
이번에 대의를 위해 구하러 왔는데, 공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니, 혹시 제가 서주를 삼키려는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십니까?
그런 마음이 있다면 하늘이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도겸이 말했다.
“이것은 늙은이의 진심입니다.”
도겸이 몇 번이고 양보했으나 유비는 끝내 받지 않았다.
이때 미축이 나서 말했다.
“지금 적병이 성 아래까지 다다랐으니 우선 적을 퇴각시키는 방책을 논의해야 합니다.
일이 끝난 후에 다시 서주의 일을 논의하시면 됩니다.”
유비가 말했다.
“제가 조조에게 화해를 권하는 글을 보낼 것입니다.
조조가 따르지 않으면 그때 싸워도 늦지 않습니다.”
유비는 세 진영에 격문을 보내 병력을 멈추게 하고, 사람을 보내 조조에게 서찰을 전달하도록 했다.
유비의 서신과 조조의 분노
조조(曹操)가 군영에서 장수들과 논의 중이었다.
그때 서주(徐州)에서 전갈이 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조조가 전서를 열어 읽으니, 그것은 유비(劉備)가 보낸 서신이었다.
서신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제가 관애(關外)에서 처음으로 명공을 뵌 이후, 각자 다른 곳에 머물러 가까이 모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날 공의 부친이 해를 입은 것은 전적으로 장개(張闓)의 불의를 탓할 일이며, 도겸(陶謙) 공의 책임은 아닙니다.
현재 황건적의 잔당은 외부를 어지럽히고, 동탁(董卓)의 잔당은 내부에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명공께서 조정의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하고, 사적인 원한은 뒤로 미루십시오.
서주에서 병력을 철수하고 국난을 구한다면, 이는 서주와 천하 모두의 다행히 될 것입니다!”
조조가 서신을 읽고 크게 노하며 말했다.
“유비란 놈이 대체 무엇이길래 감히 나를 훈계하냐! 게다가 글 속에 나를 비웃는 듯한 말투까지 있다니!”
그는 사자를 죽이라고 명령하고, 한편으로는 서주성 공략에 더욱 힘을 쏟으라고 지시했다.
이때 곽가(郭嘉)가 간언 했다.
“유비는 멀리서 구원을 와서 예의를 갖추며 서신을 먼저 보냈습니다.
주공께서 마땅히 좋은 말로 답하여 유비의 마음을 방심케 하십시오.
그런 다음 병력을 전진시켜 성을 공격하면 성을 쉽게 함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가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사자를 억류하며 회신을 준비했다.
여포의 방랑과 반격
조조가 장수들과 의논하던 중, 급히 달려온 전령이 흉한 소식을 알렸다.
조조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전령이 말했다.
“여포(呂布)가 이미 연주(兗州)를 습격해 점령하고 복양(濮陽)을 차지했습니다.”
원래 여포는 이각(李傕)과 곽사(郭汜)의 난을 피해 무관(武關)을 벗어나 원술(袁術)에게 의탁하려 했다.
하지만 원술은 여포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성격이라며 그를 믿지 못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원소(袁紹)에게 가자 원소는 그를 받아들여 장연(張燕)을 함께 격파했다.
그러나 여포는 뜻을 얻었다고 여기고 원소의 부하 장수들을 무시하며 오만하게 행동했다.
이에 원소는 그를 죽이려 했고, 여포는 다시 도망쳐 장양(張楊)에게 의지했다. 장양은 그를 받아주었다.
한편, 장안(長安)에 있던 방서(龐舒)는 여포의 아내와 자녀를 몰래 숨겨 보호하다가 여포에게 돌려보냈다.
이각과 곽사가 이를 알고 방서를 처형하고 장양에게 서신을 보내 여포를 죽이라 명령했다.
결국 여포는 장양을 떠나 장막(張邈)에게 갔다.
때마침 장막의 동생 장초(張超)가 진궁(陳宮)을 데려와 장막에게 말했다.
“이제 천하는 분열되고 영웅들이 일어나는 때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천리의 세력을 가지고도 남에게 제어받고 있으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지금 조조는 동쪽으로 원정을 나가 연주가 비어 있고, 여포는 당대의 용사입니다.
그와 함께 연주를 차지하면 패업(霸業)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여포의 연주 점령과 조조의 고민
장막(張邈)은 크게 기뻐하며 여포(呂布)에게 명령을 내려 연주(兗州)를 습격하게 했고, 여포는 이를 점령한 뒤 복양(濮陽)을 차지했다.
다만, 연주 내 견성(鄄城), 동아(東阿), 범현(範縣) 세 곳은 순욱(荀彧)과 정욱(程昱)이 계책을 짜서 끝까지 방어하여 보존되었지만, 나머지 지역은 모두 함락되었다.
조조(曹操)의 동생 조인(曹仁)은 여러 번 싸웠지만 모두 패배했고, 결국 조조에게 급보를 전했다.
이를 들은 조조는 크게 놀라며 말했다.
“연주를 잃으면 내게 돌아갈 집이 없으니, 반드시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
곽가(郭嘉)가 조언하기를,
“주공께서는 지금이야말로 유비(劉備)에게 은혜를 베풀 적기입니다.
군을 물리고 연주를 되찾으십시오.”
조조는 그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즉시 유비에게 서신을 보내고, 군영을 철수하며 퇴각을 준비했다.
도겸의 양보, 유비의 사양
사자가 서주(徐州)로 돌아와 도겸(陶謙)을 만나 조조의 군사가 철수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도겸은 크게 기뻐했다.
곧 사람을 보내 공융(孔融), 전해(田楷), 관우(雲長), 조운(子龍)을 불러 성에서 회의를 열었다.
연회가 끝난 뒤, 도겸은 유비(玄德)를 상석에 앉히고 손을 모으며 말했다.
“나는 나이가 많고 두 아들도 재능이 부족해 국가의 중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유공(劉公)은 황실의 후손으로 덕이 넓고 재주가 뛰어나니 서주를 다스릴 만합니다.
나는 물러나 조용히 병을 치료하고 싶습니다.”
이에 유비가 대답했다.
“공문거(孔文舉)께서 저를 부르신 것은 의로움을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아무 이유 없이 제가 서주를 차지하면, 천하 사람들은 저를 불의한 사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미축(糜竺)이 나서 말했다.
“지금 한실(漢室)은 쇠퇴하고 천하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때 공을 세우고 사업을 일으킬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서주는 부유하고 호구 수가 백만이나 되니 유공께서 이를 맡아야 합니다.”
그러나 유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일은 결코 제게 맞지 않습니다.”
진등(陳登)이 다시 설득했다.
“도부군(陶府君)은 병이 많아 직접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명공께서 사양하지 말고 이를 맡아주시길 바랍니다.”
유비는 끝내 거절하며 말했다.
“원공로(袁公路, 원술)는 4대에 걸쳐 3공(三公)을 지낸 명문가로, 천하가 모두 따릅니다.
그분이 가까운 수춘에 계시니 어찌 그분께 양도하지 않으십니까?”
이에 공융이 비웃으며 말했다.
“원공로는 무덤 속의 말라비틀어진 뼈일 뿐입니다.
어찌 입에 올릴 가치가 있겠습니까?
오늘의 이 일은 하늘이 준 기회이니 받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