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제, 밀조를 피로 써서 동승에게 내리다
헌제는 친히 밀詔(비밀 조서)를 지으려 하였다.
그는 손가락 끝을 물어뜯어 피를 내고, 그 피로 글을 써서 조서를 완성하였다.
이 밀조는 몰래 복황후에게 전해져, 자줏빛 비단 안감이 덧대어진 옥띠 안에 꿰매어 넣도록 하였다.
헌제는 곧 자신이 금세 수놓은 비단옷을 입고, 그 옥띠를 직접 맸다.
그 후 내시를 시켜 차국장군 동국구를 불러들이게 하였다.
동승이 입궐하여 예를 올리자, 헌제는 말하였다.
“짐은 어젯밤 후궁과 함께 하백의 치욕과 고통을 이야기하다가, 국구의 큰 공을 떠올리게 되어 특별히 불러 위로하고자 하였소.”
동승은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하였다.
헌제는 동승을 데리고 궁을 나와 태묘(太廟)로 향하였다.
그리하여 공신각(功臣閣)에 올라 향을 피우고 제례를 마친 후, 그와 함께 선왕들의 초상화를 구경하였다.
가운데에는 한 고조 유방의 화상이 걸려 있었다.
헌제가 물었다.
“우리 고조 황제께서는 어디에서 몸을 일으켜 어떻게 대업을 이루었는가?”
동승은 크게 놀라며 말하였다.
“폐하께서 신을 희롱하심이옵니까?
성조의 위업을 어찌 모르신단 말씀이옵니까?
고조 황제께서는 사상정장(泗上亭長)으로부터 출발하셨고, 삼척검을 들고 뱀을 베어 뜻을 세우셨습니다.
천하를 종횡으로 누비며, 3년 만에 진을 망하게 하고 5년 만에 초를 멸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천하를 얻고 만세의 기초를 세우신 것이옵니다.”
헌제가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조상은 이토록 영웅인데, 자손은 이처럼 나약하니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는 또 좌우의 두 인물의 초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두 사람은 유후 장량과 참후 소하가 아니냐?”
동승이 대답하였다.
“그러하옵니다. 고조께서 나라를 여신 것은 실로 이 두 사람의 힘이 컸사옵니다.”
그때 헌제는 좌우 신하들이 조금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자, 동승에게 은밀히 말하였다.
“경도 이 두 사람처럼 짐의 곁에서 나라를 도와야 하오.”
동승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신에게는 털끝만한 공로도 없사오니, 어찌 그런 자리에 감히 나설 수 있겠사옵니까?”
헌제가 말하였다.
“짐은 경이 서도에서 짐을 구출해 준 공을 조금도 잊지 않았소.
지금은 더 이상 내릴 상이 없으니…”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비단 옷과 띠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경은 짐의 이 옷을 입고, 이 띠를 매시오.
늘 짐이 곁에 있다고 생각하시오.”
동승은 엎드려 감사를 올렸다.
이에 헌제는 친히 옷과 띠를 풀어 동승에게 하사하며, 귀띔하듯 말했다.
“그대는 집에 돌아가서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시오.
짐의 뜻을 저버리지 말기를 바라오.”
동승은 그 뜻을 헤아리고 곧장 옷을 입고 띠를 맨 뒤, 황제를 향해 예를 올리고 각루에서 내려갔다.
조조가 황제의 밀조를 의심하다
이미 누군가 조조에게 알리기를,
“황제께서 지금 막 동국구와 함께 공신각에 올라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하였다.
조조는 곧바로 조정으로 들어가 상황을 살폈다.
한편, 동승은 막 공신각에서 내려와 궁문을 지나던 차에 마침 조조와 마주쳤다.
피할 틈이 없었기에, 길가에 서서 예를 올렸다.
조조가 물었다.
“국구께서는 어디에서 오시는 길이오?”
동승이 답하였다.
“방금 천자의 부름을 받아, 비단 옷과 옥대를 하사 받았습니다.”
조조가 다시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그런 은혜를 입었소?”
동승이 대답하였다.
“전하께서 신이 지난 서도(西都)에서 전하를 구한 공을 생각하시어, 특별히 은총을 내리셨습니다.”
조조가 말하였다.
“그 옥대(玉帶)를 풀어 나에게 한번 보여주시오.”
동승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옥대 속에는 틀림없이 밀조(密詔)가 숨어 있으니, 조조가 그것을 들여다볼까 두렵다’
하여 선뜻 풀어주지 못하였다.
그러자 조조는 좌우를 꾸짖으며 외쳤다.
“어서 풀어라!”
결국 동승은 어쩔 수 없이 허리띠를 풀어 주었다.
조조는 한참 동안 그것을 살펴보더니 웃으며 말하였다.
“참으로 좋은 옥대이구나!
이번엔 그 비단 옷도 벗어 나에게 보여주시오.”
동승은 마음속으로 두려워하며, 조조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겉옷을 벗어 바쳤다.
조조는 손수 그 옷을 들고 해의 그림자에 비추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살핀 뒤에는 그 옷을 자신이 직접 입고, 옥대까지 두른 뒤에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길이는 어떤가?”
좌우 신하들이 칭찬하였다.
조조가 동승에게 말하였다.
“국구께서 이 옷과 옥대를 나에게 하사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소?”
동승은 대답하였다.
“전하의 은혜로 받은 것을 감히 다시 바칠 수는 없습니다.
따로 새로 지어 드리겠습니다.”
조조가 말하였다.
“그대가 황제의 하사품을 받은 것에 혹시 어떤 꾀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니오?”
동승은 놀라며 말했다.
“신이 어찌 감히 그런 일을 꾸미겠습니까?
만일 승상이 원하신다면, 기꺼이 이것을 두고 가겠습니다.”
조조가 웃으며 말하였다.
“그대가 전하에게 받은 것을 내가 어떻게 빼앗겠소?
단지 농으로 해 본 말이오.”
그리하여 조조는 그 옷과 옥대를 벗어 동승에게 돌려주었다.
밀조를 불에 띄워 읽다 – 피로 쓴 황제의 밀명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그날 밤, 조조와 작별한 뒤 귀가한 동승은 홀로 서재에 앉아 황제가 하사한 비단옷을 꼼꼼히 뒤적이며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동승은 중얼거렸다.
“황제가 나에게 이 옷과 띠를 내려주시며, 자세히 살펴보라 하셨으니, 반드시 그 속에 숨은 뜻이 있을 터인데...
어째서 아무 흔적도 없는가?”
그는 다시 허리에 맨 옥대를 들어 살펴보았다.
눈처럼 희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옥에, 꽃 사이로 작은 용이 기어가는 듯한 조각이 있었고, 뒤편은 자줏빛 비단으로 덧대어진 아름다운 장식이었다.
바느질도 매끄럽고 단정했지만, 이 역시도 겉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동승은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그것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한참을 이리저리 뒤져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지쳐 눈을 감으려 했다.
막 책상에 기대 잠을 청하려는 찰나, 등불의 불꽃이 흘러 떨어져 옥대의 뒷부분 비단을 태웠다.
동승은 깜짝 놀라 급히 불을 껐으나, 이미 한 곳이 타들어 가 있었고, 그 틈 사이로 하얀 비단 조각이 조금 드러났으며, 그 위에 피가 묻은 듯한 흔적이 어슴푸레 비쳤다.
그는 급히 칼을 들어 그 부분을 조심스럽게 뜯어보았다.
그 안에는 바로 황제가 손수 피로 쓴 밀서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밀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짐은 들었다.
인륜의 대도리는 부자(父子)를 으뜸으로 삼고, 위아래의 도리는 군신(君臣)의 구별에 있음이라.
요사이 간적 조조가 권력을 농단하고, 군부를 업신여기며, 무리를 모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상벌과 봉작을 임의로 행하니 짐이 주인이 아니로다.
짐은 밤낮으로 근심하여 세상이 위태로울까 두렵노라.
경은 나라의 큰 신하요, 짐과 혈육으로 얽힌 외척이니,
한 고조께서 창업하신 그 고통을 생각하고,
충의롭고 두루 뜻을 이룬 열사를 모아 간신을 없애고 사직을 다시 평안케 하라.
이는 조상과 하늘에 큰 은혜가 될지니라.
짐이 손가락을 찢고 피를 뿌려 이 밀서를 쓰니,
부디 신중히 행동하고 짐의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 건안 4년 봄 3월, 황제 밀서
동승은 그 밀서를 다 읽고 나자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날 밤, 그는 눈을 붙이지 못한 채 밤을 새웠다.
날이 밝자 다시 서재로 나가 밀서를 여러 차례 정독하였으나, 조조를 제거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결국 밀서를 책상 위에 조심스레 놓고는 머리를 기대고 잠시 눈을 붙였다.
충신들의 맹서, 조조 척살 밀의
때마침 시랑 왕자복이 도착하였다.
문지기는 그가 평소 동승과 각별한 사이인 줄 알고 있었기에 막지 않고 서원 안으로 들였다.
자복은 책상에 엎드려 잠든 동승을 보고는, 소매 밑으로 삐져나온 비단에서 "짐" 자가 희미하게 드러난 것을 발견하고 의심을 품었다.
그는 몰래 비단을 꺼내 읽어본 뒤, 소매 안에 감추었다.
자복은 동승을 깨우며 말했다.
“국구께서 참 태평하시군요.
이런 때에 어찌 곤히 주무시고 계십니까?”
동승은 화들짝 놀라 일어났고, 조서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자 정신이 아득해지고 손발이 떨리며 허둥지둥했다.
자복이 웃으며 말했다.
“그대, 혹시 조공을 죽이려 하는가?
내가 이 일을 고해바치겠다.”
동승은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다.
“형께서 그러시면 한실은 이제 끝장입니다!”
자복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농이 었소.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나라의 은혜를 입어왔소.
어찌 충의를 저버리겠소?
그대를 도와 이 국적을 함께 처단하리이다.”
이에 동승은 감격하며 말했다.
“형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이는 나라의 큰 복입니다!”
자복은 맹세를 제안하며 말했다.
“비밀리에 의서를 쓰고, 우리 각자의 삼족을 걸고 한 황제께 충성을 맹세합시다.”
동승은 즉시 흰 비단을 꺼내어 먼저 이름을 쓰고 서명하였고, 자복도 이어서 이름을 적었다.
자복은 말했다.
“장군 오자란은 내 막역한 사이이니, 그도 함께할 수 있을 것이오.”
동승은 말했다.
“조정의 대신 중에는 장수교위 종집과 의랑 오석만이 내 심복이니, 반드시 함께할 것입니다.”
그들이 한창 논의하던 중, 하인이 들어와 종집과 오석이 문안을 왔다고 전했다.
동승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도우심이로다!”
자복을 병풍 뒤에 숨기고, 두 사람을 맞아 앉힌 후 차를 내었다.
종집이 말했다.
“허전 사냥 사건, 그대도 원한이 남았겠지?”
동승은 말했다.
“한이 크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지요.”
오석이 말했다.
“나는 이 도적을 죽이리라 다짐했소.
다만 뜻을 함께할 이가 없었을 뿐이오!”
종집이 덧붙였다.
“나라를 위해 해로운 자를 없애는 길이라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때 병풍 뒤에서 자복이 나와 말했다.
“너희 둘이 조승상을 죽이려 하는구나!
내가 이를 고하겠다.
국구 동승이 바로 증인이다.”
이에 종집이 분노하여 말했다.
“충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차라리 죽어 한나라 귀신이 될지언정, 너처럼 간신에게 아첨하진 않겠다!”
밀사에게 밀조를 보이다, 충의를 깨우치다
동승이 웃으며 말하였다.
“우리가 바로 이 일을 의논하려던 참이었소.
왕자복의 말은 농담이오.”
그리고는 소매 속에서 밀지를 꺼내어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두 사람이 그 밀지를 읽자,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에 동승은 그들에게 서명을 청하였고, 왕자복은 말하였다.
“두 분은 이곳에 잠시 머무시고, 제가 가서 우자란을 모셔오겠소.”
잠시 뒤, 자복은 우자란과 함께 돌아왔고, 이들은 서로 인사를 나눈 후, 모두 서명하였다.
동승은 이들을 후당으로 초대하여 술을 함께 마셨다.
그때 갑자기 문지기가 알렸다.
“서량태수 마등이 찾아왔습니다.”
동승은 말하였다.
“내 병이 났다 하여 접견할 수 없다고 전하게.”
문지기가 이를 전하니, 마등은 크게 노하며 말하였다.
“나는 어젯밤 동화문 밖에서 분명 그가 비단옷과 옥띠를 두르고 나가는 것을 보았거늘, 무슨 병이란 말인가?
내가 아무 까닭 없이 찾아온 것이 아닌데, 어찌 나를 거절하는가!”
문지기가 이를 보고하니, 동승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여러 분은 잠시 기다려주시오.
내가 다녀오겠소.”
그리고는 곧바로 마등을 맞이하러 나가 인사를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마등이 말했다.
“내가 황제께 알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작별 인사를 드리려 왔거늘, 어찌 나를 뵙지 않으려 하셨소?”
동승이 말하였다.
“천한 몸에 갑작스레 병이 나서, 마중하지 못했으니 큰 실례가 있었소.”
마등은 말하였다.
“그대의 얼굴에는 오히려 화색이 돌고 있으니, 병색이라 할 수 없겠구려.”
동승은 이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마등은 노하여 소매를 걷어내며 일어서며 한숨을 쉬었다.
“모두가 나라를 구할 사람이 아니로다!”
동승은 그 말에 감동하여 그를 붙잡고 물었다.
“공께서 말하신 나라를 구하지 못할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오?”
마등이 말하였다.
“허전에서의 사냥 사건은 아직도 내 가슴에 울분으로 남아 있소.
그대는 국왕의 근친임에도 향락에 빠져 사니, 어찌 조조를 토벌하고 황실을 구제할 수 있겠소?”
동승은 혹시라도 그가 의심하여 시험하는 것일까 두려워하여 놀란 척하며 말하였다.
“조승상은 국정의 중임을 맡은 신하요, 조정의 의지처이거늘,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시오?”
마등이 대로하며 말하였다.
“그대는 아직도 조조 같은 도적을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오?”
동승이 말하였다.
“귀와 눈이 가까운 곳에 있으니, 부디 목소리를 낮추시오.”
마등은 크게 꾸짖으며 말하였다.
“생명을 아끼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무리는 큰일을 논할 자격이 없소!”
그 말을 마친 뒤, 다시 몸을 돌리려 하였다.
동승은 마등이 충의의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말하였다.
“공이여,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오.
보여드릴 것이 있소.”
그리고는 마등을 서원으로 인도하여 황제가 직접 피로 쓴 밀조를 보여주었다.
의혈을 맹세하고 천자의 뜻을 받들다
등(마등)이 밀조를 읽고 나자 온몸에 털이 곤두서고, 이를 악물며 입술을 깨물어 입안 가득 피가 맺히니, 분노가 극에 달했다.
그는 굳은 목소리로 동승에게 말하였다.
“공께서 만약 행동을 일으키신다면, 나는 곧바로 서량(西涼)의 병력을 이끌고 외곽에서 응할 것이오!”
이에 동승은 즉시 마등을 다른 결사들과 대면하게 하였고, 그 앞에 이미 준비해 둔 의장(義狀)을 펼쳐 보이며 서명을 청하였다.
마등은 술을 들고 하늘에 맹세하며 피를 나누는 의식을 행한 뒤, 비장하게 말하였다.
“우리 일당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 맹약을 결코 저버리지 않겠다!”
그는 자리 위에 모인 다섯 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덧붙였다.
“열 사람만 모일 수 있다면, 대업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이에 동승이 말하였다.
“충성과 의리는 얻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함께할 이들이 만약 참된 자들이 아니라면, 도리어 그들이 화근이 될 것이외다.”
그러자 마등은 *‘원행로서부(鴛行鷺序簿)’*라는 명부를 가져오게 하여 이를 펼쳐 검토하였다.
그가 유씨(劉氏)의 종친 항목을 보다가 손뼉을 치며 크게 외쳤다.
“왜 이 인물과 함께 도모하지 않습니까?”
모두 그가 누구를 말하는지 묻자, 마등은 느릿하고 신중한 말투로 그 인물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이때 마등이 지목한 자는 다름 아닌—
천자의 비밀 조서를 받아 든 국구(國舅) 동승이었고,
한실의 종친으로서 황실 재건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자였다.
과연 마등이 지목한 그 인물은 누구이며, 이 거사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다음 이야기에 이어지니, 그 끝을 기다려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