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三回
禰正平裸衣罵賊 吉太醫下毒遭刑
예정평 나의매적 길태의 하독조형
예형이 알몸으로 도적(조조)을 욕하고, 태의 길평은 독을 쓰다 형벌을 당하다
공융의 간언과 유엽의 사절
각설, 조조는 유대와 왕충을 참하려 하였다.
이에 공융이 간언하기를,
“이 두 사람은 본래 유비의 적수가 아니옵니다.
만약 이들을 참하신다면 장졸들의 마음을 잃을까 염려되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조조는 그들의 죽음을 면하게 하고, 작위와 녹봉을 삭탈하여 내쳤다.
곧 스스로 병사를 일으켜 현덕(유비)을 치려 하였다.
그러자 공융이 다시 간언하기를,
“지금은 한창 삭풍(朔風)이 몰아치는 엄동설한(隆冬盛寒)이니 병사를 움직이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내년 봄을 기다리셔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먼저 사람을 보내어 장수와 유표를 회유하여 귀순하게 하신 뒤, 다시금 서주(徐州)를 도모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조조가 그 말을 옳게 여겨, 먼저 유엽을 사자로 삼아 장수를 설득하게 하였다.
유엽이 양성에 이르러, 먼저 가후를 찾아가 조공(조조)의 큰 덕을 열거하여 찬양하니, 가후가 유엽을 집안에 머물게 하였다.
가후의 결단과 장수의 귀부
이튿날, 가후는 장수를 찾아가, 조공이 유엽을 보내어 귀순을 권유한 사연을 아뢰었다.
막 의논을 나누는 중에, 문득 원소의 사자가 도착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장수가 명하여 그를 들이라 하니, 사자가 서신을 바쳤다.
장수가 펼쳐 읽어보니, 그 또한 귀부(歸附)를 권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가후가 사자에게 묻기를,
“요사이 군사를 일으켜 조조를 친다더니, 승부는 어떠하였소?”
사자가 대답하였다.
“지금은 한겨울이라 잠시 병사를 거두었습니다.
이번에 장군께서 형주(荊州)의 유표와 더불어 국사(國士)의 풍모를 지니셨기에, 청하러 온 것뿐입니다.”
가후가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그대는 본초(원소)에게 돌아가 전하시오.
너희 형제도 화합하지 못하면서, 어찌 천하의 국사들을 포용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서신을 찢어버리고 사자를 꾸짖어 내쫓았다.
장수가 말하였다.
“지금은 원소가 강하고 조조는 약한데, 이제 서신을 찢고 사신을 꾸짖어 보냈으니, 만일 원소가 군사를 이끌고 온다면 어찌하겠소?”
가후가 응답하기를,
“차라리 조조를 따르는 것이 낫습니다.”
장수가 말하였다.
“나는 예전에 조조와 원한을 맺은 바 있는데, 어찌 서로 용납할 수 있겠소?”
가후가 말하였다.
“조조를 따를 이유는 세 가지가 있소.
첫째, 조공은 천자의 조서(詔書)를 받들어 천하를 정벌하고 있으니, 그를 따름이 의리(義理)에 부합하오.
둘째, 원소는 강성하나 우리가 적은 병력으로 그를 따르더라도 우리를 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나, 조조는 비록 약하나 우리가 귀순한다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니, 그를 따름이 실익에 맞소.
셋째, 조공은 왕패(王霸)의 뜻을 품고 있어 사사로운 원한을 풀고 넓은 덕으로 사해(四海)에 명성을 떨치려 하니, 그를 따름이 대의(大義)에 부합하오. 바라건대, 장군께서 더는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장수가 이에 그 말을 좇아, 유엽을 불러 서로 상견(相見)하였다.
유엽이 조조의 높은 덕을 한껏 칭송하고 말하기를,
“승상께서 만일 옛 원한을 잊지 않으셨다면, 어찌 저를 보내어 장군과 화친을 맺고자 하셨겠습니까?”
장수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즉시 가후와 함께 허도(許都)로 나아가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장수의 귀부와 예형의 천거
장수가 허도(許都)에 이르자, 조조를 뵙고 계단 아래에서 절을 올렸다.
조조는 급히 장수를 일으켜 세우며 손을 잡고 말하였다.
“작은 실수였을 뿐이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오.”
곧 장수를 양무장군(揚武將軍)에 봉하고, 가후를 집금오사(執金吾使)에 임명하였다.
조조는 곧 장수에게 명하여 유표에게 귀순을 권하는 서신을 쓰게 하였다.
이에 가후가 나아가 아뢰기를,
“유경승(유표)은 명사(名士)를 교우하기를 좋아하니, 반드시 문명(文名) 있는 선비를 보내어 설득해야만 항복할 것입니다.”
조조가 순유(荀攸)에게 물었다.
“누가 그 사명을 맡을 수 있겠소?”
순유가 아뢰었다.
“공문거(공융)가 적임입니다.”
조조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순유가 곧 나가 공융을 찾아가 말하였다.
“승상께서 문장으로 이름난 선비를 사신으로 삼으려 하시니, 공께서 그 임무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공융이 말하였다.
“내 벗 예형, 자는 정평(正平)이라 하며, 재주는 제 것보다 열 배는 뛰어납니다.
이 사람은 마땅히 황제 곁에 있어야 할 인물로, 단지 사신에 머물 사람이 아니오.
제가 곧 천자께 천거하겠소이다.”
이에 곧 상주문을 지어 올리니, 그 글에 이르기를:
“신은 들었사옵니다.
홍수가 범람할 때, 임금은 어진 이들을 널리 구하여 다스림을 돕게 하셨고, 사방을 돌아보아 현명하고 준걸한 자를 초빙하셨다고 합니다.
옛날 세종(世宗, 한무제)께서 대업을 계승하실 때, 치세의 기초를 넓히려 하시어, 널리 인재를 불러 모으시니, 선비들이 울려 떼를 지어 몰려왔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도 예지와 성덕을 겸비하시고 황통을 계승하신 이래로, 흉흉한 시운을 만나 근신하시며 매일같이 애쓰시니, 하늘이 높은 산에 신령을 내려 보내듯이, 이 시대에 걸출한 인재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사옵니다.
신이 보건대, 평원(平原)의 처사 예형은 나이 스물네 살로 자는 정평이옵고, 그 품성은 맑고 굳으며 재능은 뛰어나 사람들을 뛰어넘사옵니다.
문학에 막 입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눈으로 한 번 보면 곧 외우고, 귀로 잠깐 들은 것은 곧 마음에 새겨 잊지 아니하며, 천성은 도에 부합하고, 그 생각은 마치 신의 계시 같사옵니다.
그는 상홍양(桑弘羊)의 깊은 계책과 장안세(張安世)의 조용한 통찰에 견줄 만하고, 충직하며 결단력이 있으며, 선을 보면 경이로워하고, 악을 보면 원수처럼 미워하며, 옛 임좌(任座)의 고결한 행실이나 사어(史魚)의 절개도 따르지 못할 만큼 고매하옵니다.
맹금이 수백 마리 있다 해도, 물수리 한 마리를 당하지 못하는 법이니, 예형이 조정에 서게 된다면 반드시 뛰어난 풍모를 보여줄 것이옵니다.”
예형의 자긍과 조조와의 첫 대면
황제가 이 상주문을 보시고는 조조에게 그 처리를 맡겼다.
조조는 곧 사람을 보내 예형을 불러오게 하였다.
예형이 입조하여 예를 올렸으나, 조조는 그를 앉게 하지 않았다.
예형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였다.
“천지는 이토록 광대하건만, 어찌 단 한 사람의 인물도 없단 말인가!”
조조가 말하였다.
“내 수하에는 수십 명의 호걸이 있으니, 어찌 사람이 없다 하겠는가?”
예형이 대꾸하였다.
“듣고 싶습니다.”
조조가 말하였다.
“순욱, 순유, 곽가, 정욱은 기략이 깊고 지혜가 원대하여 비록 한고의 소하, 진평이라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장요, 허저, 이전, 악진은 용맹하여 당해낼 자가 없으니, 한 초의 잠팽, 마무도 따를 바 못 된다.
여건, 만총은 종사를 맡고 있고, 우금, 서황은 선봉에 서 있으며, 하후돈은 천하에 보기 드문 재주요, 조자효(조인)는 세상의 복록을 타고난 장수다.
이들이 어찌 인물이 아니겠는가?”
예형이 비웃으며 말하였다.
“공의 말씀이 틀렸습니다.
이들 인물은 내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순욱은 상가를 문상 다니며 병문안을 맡기기에 좋고, 순유는 무덤을 지키며 제사를 주관하는 것이 합당하오.
정욱은 문을 지키고 문단속이나 하기에 알맞으며, 곽가는 시나 읊고 문장이나 읽을 수 있겠지요.
장요는 북 치고 징 울리면 어울릴 것이고, 허저는 소나 말이나 방목하면 족하고, 악진은 문서를 받들어 조서나 읽고, 이전은 편지를 전달하는 심부름이 딱이요.
여건은 칼이나 갈고, 만총은 술 마시며 밥 축내기엔 적합하오.
우금은 나무 판을 지고 성벽이나 쌓고, 서황은 개나 돼지나 도살하면 그만이지요.
하후돈은 그저 멀쩡한 몸뚱이를 가진 장군이라 할 만하고, 조자효는 돈이나 밝히는 태수요.
그 외에 남은 자들은 옷걸이요, 밥자루요, 술통이요, 고기부대일 뿐이외다!”
조조가 크게 노하며 물었다.
“그대는 과연 무엇이 그리도 능하다는 말인가?”
예형이 당당히 답하였다.
“천문지리(天文地理)에 통달하지 못한 바 없고, 삼교구류(三敎九流, 유·불·도 및 제자백가)의 학문에도 밝지 않은 바 없소.
위로는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도와 세우고, 아래로는 공자(孔子), 안회(顔回)처럼 덕을 펼 수 있소이다.
어찌 이런 속인들과 함께 논하겠소!”
그 자리에 장요(張遼)가 함께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즉시 칼을 뽑아 베려 하자, 조조가 말하였다.
“마침 조정에서 연회가 있을 터인데 북을 칠 자가 마땅치 않으니, 예형을 그 자리에 세워 북을 치게 하라.”
예형은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응낙하고 물러갔다.
장요가 조조에게 아뢰었다.
“이 자는 언사가 불손하니 어찌 죽이지 않으십니까?”
조조가 말하였다.
“이 자는 허명(虛名,겉치레 명성)이 천하에 퍼졌으니, 내가 오늘 죽이면 사람들은 나를 포용력 없는 자로 여길 것이다.
그 스스로 재주가 있다 자처하니, 북 치는 자리에 세워 그를 모욕하려는 것이오.”
예형의 옷벗은 모욕과 조조의 분노
이튿날, 조조는 조정 관청의 대청에서 큰 연회를 베풀고, 예형에게 북을 치게 하였다.
종래의 북치는 자가 말하기를,
"북을 치려면 반드시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라고 하였으나, 예형은 헌 옷 그대로 입고 들어와 북을 쳤다.
그는 『어양삼타(漁陽三撾)』를 연주하였는데, 그 음절이 참으로 묘하여, 깊은 물소리처럼 울려 퍼지며 쇠와 돌이 부딪히는 듯하였다.
좌중의 손님들이 듣고는 비분강개하여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좌우에서 외치기를,
“어찌하여 옷을 갈아입지 않느냐!”
하자, 예형은 사람들 앞에서 해어진 낡은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우뚝 서서 전신을 드러냈다.
좌중의 인물들은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으나, 예형은 태연히 속바지를 천천히 입으며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조조가 꾸짖어 말하였다.
“묘당(廟堂) 위에서 어찌 이다지도 무례하단 말이냐!”
예형이 응수하였다.
“임금을 속이고 상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야말로 무례한 것이오.
나는 다만 부모님께 물려받은 이 몸을 드러냄으로써, 내 청백한 육신을 보일 뿐이오.”
조조가 묻기를,
“그대가 청백하다면, 누가 더럽단 말이냐?”
예형이 응수하였다.
“공께서는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를 분별하지 못하니, 눈이 탁한 것이오.
시와 서(書)를 읽지 않으니 입이 탁하고,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귀가 탁하며, 고금에 통달하지 않으니 몸이 탁하고, 제후를 품지 않으니 뱃속이 탁하며, 늘 찬역(篡逆: 왕위나 권력을 빼앗고, 나라의 도리를 거스르는 반역 행위)을 품고 있으니 그 마음이야말로 가장 탁한 것이오!
내가 천하에 이름난 선비인데, 나를 북 치는 하찮은 자리에 세우다니, 이는 마치 양화(陽貨)가 공자(仲尼)를 업신여기고, 장창(臧倉)이 맹자(孟子)를 비방한 것과 무엇이 다르오?
왕도와 패업을 이루고자 한다면서 사람을 이토록 업신여기다니, 그릇됨이 크도다!”
이때 공융이 좌석에 함께 있었는데, 조조가 예형을 죽일까 두려워 조용히 아뢰기를,
“예형의 언행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오니, 성군들이 기용하던 바른 인재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조조가 예형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대는 형주(荊州)에 사신으로 가시오.
만약 유표가 귀순하면 그대를 공경대신에 임명하겠소이다.”
예형은 이를 마다하였다.
조조가 말 세 필을 준비하여, 하인을 시켜 억지로 태워 보냈고, 아울러 문무백관에게는 동문(東門) 밖에 술상을 마련하여 배웅하게 하였다.
예형의 장송과 유표의 의심
순욱이 말하였다.
“예형이 오더라도 굳이 일어나 마중하지 마시오.”
예형이 형주로 향하던 길에 허도(許都)에 들러 순욱 등을 방문하였다.
예형이 말에서 내려 입실하니,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말없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이에 예형이 큰 소리로 곡을 하며 통곡하였다.
순욱이 묻기를,
“무슨 까닭으로 울고 있소?”
예형이 대답하였다.
“나는 죽은 시신들 사이를 지나가는 중이니 어찌 울지 않겠소?”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이 분개하며 말하였다.
“우리가 죽은 시신이라면, 너는 바로 머리 없는 미친 귀신이로다!”
예형이 응수하였다.
“나는 한(漢) 조정의 신하로서, 조만(조조의 아명)의 무리가 아니니 어찌 머리가 없겠소?”
그 말에 모두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순욱이 급히 말리며 말하였다.
“저런 쥐나 참새 같은 족속을 어찌 칼로 더럽히겠는가!”
그러자 예형이 외치기를,
“나는 쥐나 참새라 해도 아직 사람의 본성이 남았지만, 너희들은 그저 벌레에 지나지 않소!”
좌중은 모두 분개하여 해산하였다.
예형이 형주에 도착하여 유표를 알현하였다.
말로는 덕을 찬미하였으나, 그 말투는 끊임없이 풍자와 조롱이 섞여 있었다.
유표는 이를 듣고 마음에 불쾌해하며, 예형에게 강하(江夏)로 가서 황조를 만나보라 명하였다.
이에 어떤 자가 유표에게 아뢰기를,
“예형이 주공을 희롱하였는데, 어찌 그를 죽이지 않으십니까?”
유표가 말하였다.
“예형이 조조를 수차례 능멸하였으나, 조조가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인심을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오.
그러니 나에게 사신으로 보낸 것은 내 손을 빌려 그를 죽이고, 내가 어진 이를 해친 자로 소문나게 하려는 계략이오.
내가 지금 그를 황조에게 보내는 것은 조조에게 나 역시 그 수를 간파하고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오.”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그 지혜를 칭송하였다.
예형의 최후와 조조의 음모
그 무렵, 원소 또한 사신을 보내왔다.
유표는 여러 모사들에게 물었다.
“원본초(원소)가 사자를 보냈고, 조맹덕(조조)은 예형을 우리에게 보냈소.
어느 쪽을 좇는 것이 옳겠소?”
이에 종사중랑장(從事中郎將) 한숭이 나아와 말하였다.
“지금 두 영웅이 서로 맞서고 있으니, 장군께서 무언가 도모하시려면 바로 이 틈을 타 적을 무찌르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중 옳은 이를 택해 따라야 하옵니다.
지금 조조는 용병에 능하고, 현명한 인물들이 그에게 귀의하였으니, 그 세력으로 반드시 먼저 원소를 정벌한 후, 강동(江東)으로 군사를 돌릴 것입니다.
장군께서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까 염려되오니, 차라리 형주를 들어 조조에게 귀의하시면 조공이 틀림없이 장군을 중히 대할 것입니다.”
유표가 말하였다.
“그대가 허도로 가서 조정의 동향을 살펴보고 돌아오면 다시 논의하겠소.”
한숭이 말하였다.
“군신은 각기 정해진 분수와 충의를 지켜야 하옵니다.
제가 지금 장군을 섬기고 있으니, 끓는 물과 불 속이라도 오직 명에 따를 뿐입니다.
만일 장군께서 위로는 천자를 받들고, 아래로는 조공을 따르신다면 저도 마땅히 순종하겠으나, 만약 여전히 의심을 품고 망설이신다면, 제가 서울에 들어가 천자가 저에게 관직을 내리시면 저는 곧 천자의 신하가 되어 장군을 위하여 죽을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유표가 말하였다.
“먼저 다녀오시오. 내게 따로 뜻이 있소.”
이에 한숭은 유표와 작별하고 허도로 떠나 조조를 알현하였다.
조조는 그를 시중(侍中)으로 삼고, 영릉태수(零陵太守)에 임명하였다.
그 뒤 순욱(荀彧)이 조조에게 아뢰었다.
“한숭은 아직 아무 공도 세우지 않았거늘, 어찌 이리도 후하게 작위를 내리시옵니까?
예형의 행방도 알지 못하는데, 승상께서는 묻지도 않으시니 무슨 뜻이 오니까?”
조조가 대답하였다.
“예형이 나를 심히 능욕하였으니, 유표의 손을 빌려 그를 죽이려 한 것이오.
굳이 다시 묻겠는가?”
그는 곧 한숭을 다시 형주로 돌려보내어 유표를 설득하게 하였다.
한숭이 형주로 돌아가 유표를 알현하고 조정의 성덕(盛德)을 칭송하며, 유표에게, 아들과 함께 황제에게 인사드리러 조정에 가라고 권하였다.
이에 유표는 크게 노하며 말하였다.
“그대가 두 마음을 품고 있구나!”
그리고는 그를 참하려 하였다. 한숭이 크게 외치기를,
“장군께서 저를 저버리셨으니, 어찌 제가 장군을 저버리지 않겠습니까!”
괴량이 나아가 말하였다.
“한숭은 떠나기 전에도 이러한 말을 미리 하였사옵니다.”
이에 유표는 노여움을 풀고 그를 용서하였다.
이때 황조가 예형을 참하였다는 소식이 올라오자, 유표는 그 이유를 물었다.
누군가 대답하였다.
“황조가 예형과 함께 술을 마시다 서로 취하였는데, 황조가 묻기를,
‘그대가 허도에 있어 보니 어떤 인물이 있었소?’
예형이 대답하기를,
‘큰 아이는 공문거(孔文舉, 공융)요, 작은 아이는 양덕조(楊德祖, 양수)입니다.
그 둘을 제외하고는 인물이라 할 자가 없습니다.’
황조가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나와 비교하면 어떻소?’
예형이 응수하기를,
‘그대는 사당의 신과 같소.
비록 제사를 받지만 아무런 신령스러움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외다!’
황조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나를 흙덩이 인형으로 보는 것이냐!’
곧 예형을 참하였사옵니다.
예형은 죽는 순간까지도 입으로 조조를 욕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유표는 예형의 죽음을 듣고 깊이 탄식하며, 그를 앵무주(鸚鵡洲) 가에 장사 지내게 하였다.
뒷사람이 시를 지어 예형을 애도하였다.
黃祖才非長者儔,
禰衡珠碎此江頭。
今來鸚鵡洲邊過,
惟有無情碧水流。
황조의 재주는 장부의 반열에 들지 못하거늘,
예형이 강어귀에서 구슬처럼 부서졌구나.
오늘도 앵무주 근처를 지나다 보면,
오직 무정한 푸른 강물만이 흐르도다.